학교에서 부모에게 책임 전가

‘엄마 확인’ 알림장 제도 바꿔야

평일 오후 열리는 학부모 총회

워킹맘은 가고 싶어도 못 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엄청난 전쟁이 시작됐다.”

지난 22일 서울 서초동 법무법인 온세상 회의실에 워킹맘들이 모였다. 김재련(법무법인 온세상 대표) 변호사, 백연아 다큐멘터리 감독, 신세진 인사동 비솝 대표, 조혜영 여성신문 편집국장 등 ‘워킹’과 ‘맘’ 사이에서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모인 이유는 교육 문제 때문이다.

아이와 함께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워킹맘들은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육아에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초등학교 1학년은 ‘손이 가장 많이 가는 시기’로 꼽히며, 이때 퇴사를 고민하는 워킹맘이 가장 많은 것도 현실이다.

간신히 그 시간을 버티고 학년이 올라가도 워킹맘에겐 남겨진 숙제가 많다. 워킹맘도 전업맘도 모두 윈윈할 수 있는 교육환경은 불가능할까? 워킹맘이 말하는 솔직한 고민을 들어봤다. 유일한 남성 참가자 밥 힐드레스(Bob Hildreth) 전 용산 국제학교 교장은 미국의 사례를 들어 적절한 대안을 제시했다.

▲ 9살 세쌍둥이 아들을 키우고 있는 김재련 변호사.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알림장은 엄마들 숙제”

김재련(이하 김)= 작년에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엄청난 전쟁이 시작됐다. 1학년인데도 과제가 많다. 아이 혼자 하기에는 어려운 것들이 많아서 부모의 도움 없이는 힘들다. 하루에 6~7개씩 적어오는 알림장도 문제다. 엄마에게 알림장만 주면 준비해주니까 아이는 피동적이 된다. 엄마가 한 번 더 학교에 다니는 것 같다. 알림장앱도 엄마 숙제다. 엄마보고 빨리빨리 보라는 거 아닌가. 알림장을 없애고 아이가 기억할 수 있을 정도만 전달해주면 좋겠다.

백연아(이하 백)= 알림장은 워킹맘만의 문제는 아니다. 학교와 학부모의 책임 소재가 어디로 가는지의 문제다. 학교가 많은 부분의 책임을 학부모에게 떠넘긴다는 생각이 든다.

김= 선생님들의 고충은 안다. 교육 차시에 맞춰야 하는데 한정된 시간에 소화하기 어려워서 과제의 상당 부분을 집으로 보내 돕도록 한다. 그런데 ‘집에서 숙제를 해와라’ 까지만 해야지 엄마가 또 확인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숙제를) 못해 갔을 때 아이는 엄마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자기가 그 시간에 놀아서 못한 게 아니라 엄마가 체크를 못 해줘서 안 한 거니까 엄마로서는 두 배의 부담을 가져야 한다. 아이의 과제와 엄마의 과제를 명확히 분리해야 한다. 미국도 그런가.

밥 힐드레스(이하 밥)= 학교와 선생님에 따라 다르다. 미국 교육제도가 모든 해결책을 갖고 있진 않지만, 부모들이 직접 참여해 공동체의 건의에 따라 학교를 운영하는 점은 미국의 장점이다. 한국은 변화가 굉장히 빠르다. 변화하려면 기존의 흐름과 역행하는 게 아니라 같이 가면서 자연스럽게 바꾸는 방향으로 변화를 일궈야 한다.

▲ 9살 아들을 키우는 백연아 다큐멘터리 감독.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백= 우리나라의 유교적인 특성 때문인지 서구에 비하면 아이들의 자존감을 보호하고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는 인식이 약하다. 아이들에게 뭔가 제시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알림장은 아이들의 자율성을 뺏는 형식이다. 엄마가 학교생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겠지만 그런 형식으로 나와서는 안 될 거 같다.

“가고 싶어도 못 가는 학부모총회”

조혜영(이하 조)= 학부모총회를 낮 2시에 잡았더라. 일하는 부모들이 평일 2시에 참석하려면 휴가를 내야 해서 교육부도 저녁에 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학교 측에 시간을 옮겨달라고 건의했더니 ‘의논은 해보겠으나 굉장히 어려울 거 같다’는 답변을 들었다. 당일에 조퇴하고 회의에 갔더니 이미 다 끝났더라. 사소하지만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총회인데 얼마든지 배려할 수 있는 문제다.

신세진(이하 신)= 학교 선생님도 일하는 엄마인데 학교 운영 시스템을 전업맘에게만 위임한다. 녹색어머니회와 급식 담당 등 모든 시스템을 시간이 많은 엄마가 낮에 할애하게끔 하니 워킹맘은 배제된다. 주도권을 가진 엄마들이 시간 변경을 양보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조= 넓은 의미에서 보면 워킹맘이나 전업맘이나 똑같이 일하는 엄마들이다. 교육문제는 일하듯이 치열하게 관심을 갖고 해결하려는 의지로 워킹맘이 교육의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없을까. 냉정하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학교 문제를 볼 수는 없나. 아이와 교육을 개인적인 접근으로 바라보지 말고 큰 구조 안에서 바라봤으면 좋겠다.

백= 편 가르기 보다는 일하듯 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학부모회나 학생회가 자치기구로서 유명무실하다. 학부모회가 굉장히 자체적으로 활성화 돼야 한다. 학부모가 변해야 학교가 변한다. 의견을 제시했을 때 학교가 무시할 수 없다. 공동체 의식에서 시작해야 반영될 수 있다. 다 같이 나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바꿔야 한다. 학생회는 학생회대로 학부모회는 학부모회대로 활발하게 활성화되면 좋겠다.

▲ 내년에 초등학교 학부모가 되는 7살 아들의 엄마 신세진 인사동 비솝 대표.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신= 학교는 교육부에서 내려오는 지침을 소화해야 해서 그걸 쫓아가기에 바쁘다. 학부모회도 학부모가 구성하는 게 아니라 학교에서 이미 다 선정해서 진행한다. 실제로 반대표 엄마를 뽑을 때도 왜 저 엄마가 됐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냥 따라가는 거다. 학부모들이 연대하려면 약간의 제도적인 압박도 필요하다.

김= 녹색어머니회도 바꿔야 한다. 교통안전을 지키는 일인데 꼭 엄마가 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똑같이 바쁜데 아빠가 하면 안 되나. 학교에 얘기했더니 ‘아버님이 오셔도 된다’고 해서 용어를 바꾸라고 건의했다. 이제 녹색 학부모회라고 바꾸긴 했는데 유인물에는 여전히 녹색어머니회로 온다. 의식적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법이랑 제도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조금만 배려하는 차원에서 접근하면 된다.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대표들이 그룹 내에서 수렴된 문제를 건의하는 협의체를 발족하면 좋을 거 같다.

조= 학부모의 인식이 굉장히 중요하다. 학교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 학부모회는 저녁에 해야 한다. 이건 아이의 일이고 경쟁이 아니라 협력하는 일이다. 부모들이 그걸 인식하지 못하고 학교에서 하라는 걸 다 하는 엄마는 좋은 엄마 아니면 불량 엄마라고 판단해버린다. 다른 엄마와 비교하면 나는 늘 성의 없는 엄마가 된다. 계속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경쟁보다 협력 가르쳤으면”

김= 스티커 제도에도 문제가 있다. 학사 일정을 잘 따라가고 뛰어다니지 않고 숙제를 잘 해오면 스티커를 받는다. 레드, 옐로우, 그린, 블루 4개 영역에서 블루는 가장 좋은 영역이다. 옐로우에 있다가 레드로 내려갈 수도 있어서 그린으로 올라가려고 애를 쓴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통제하는 측면에서는 편하고 좋지만 그게 곧 경쟁이다. 스티커를 더 받으려면 아이들끼리 협력해야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더 앞서가야 하는 거다.

신= 학교가 제도를 쫓아가다 보니 학교끼리 경쟁하면서 협동이 아니라 경쟁하는 학교를 만든다. 선생님도 아이들에게 신경을 쓰는 시간보다 서류 작성에 쓰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다. 관심받는 아이들은 실력이 뛰어난 10명 내외의 아이들이다. 엄마들 입장에서 아이가 관심을 받게 하려면 엄마 모임에도 빠지면 안 되고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아이를 부각해야 하는 현실이다.

▲ 밥 힐드레스 전 용산 국제학교 교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밥= 경쟁 위주의 교육이 아니라 개개인이 협동을 통해서 지식 기반을 넓혀나가는 게 중요하다. 나는 학생들에게 ‘사랑해, 자랑스러워, 이건 변하지 않아’라고 말해준다. 이 얘기를 해주는 이유는 시행착오는 당연한 일이고 항상 널 지지한다고 말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이나 학부모에게 돈과 권력이 최고라고 한다면 우리 사회는 붕괴하고 말거다. 평생 8명의 자살한 학생을 묻었는데 어느 부모도 자식의 무덤 앞에서 ‘넌 왜 1등을 못했냐’고 말하지 않았다.

조= 2000년대 초반부터 대안학교가 많이 생겼다. 청소년 자살률이 높아지면서 지금의 시스템으로는 안 된다는 의식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1등을 해도 경쟁력이 없다는 걸 알게 됐고, 교육에 대한 의식은 변했다. 이미 경쟁교육의 신화는 깨졌는데 학교가 바뀌지 않는 거다. 참관수업 때 교실에 들어가니 선생님이 판서를 안 하고 애들은 모니터를 보고 있더라. 아이들과 교사들의 소통방식이 기계적이다. 유인물을 나눠주고 행정적인 방식으로 소통하는 문제도 심각하다. 새로운 교육 운동이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김= 지금은 컴퓨터를 누르기만 하면 답이 나오기 때문에 교육의 방향성을 점검해야 한다. 외울 필요가 없어진 21세기 경쟁력은 창의적이고 독립적인 것에서 나온다. 학교 교육도 시대적인 흐름을 맞춰가야 할 필요는 있지만, 결국 기계를 움직이고 컴퓨터를 움직이는 것은 사람의 창의력이니까 문화, 예술 등 인문학적 소양이 더 넓어져야 한다.

밥= 내가 어렸을 때 선생님이 ‘오늘은 십진법을 기반으로 한 미터법을 공부할 거야’라고 했다. ‘십진법이 뭡니까’ 했더니 ‘그런 게 있다’라고만 답했다. 창의적이고 독립적인 교육을 하려면 선생님도 바뀌어야 한다.

신= 학교마다 발명교실이 있는데 아이들의 재능을 계발하는 수업이 아니고 대학에 갈 때 가산점을 받고, 이 점수로 어느 대학에 갈 수 있는지를 가르친다. 엄마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아이의 것처럼 주입해서 발명을 시키기도 한다. 나라에서 창조, 창의를 밀어붙이면 학교가 그쪽으로 확 쏠렸다가 평준성이 없어지는 것도 문제다.

▲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육아에 새로운 전환기를 맞은 워킹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조혜영, 신세진, 김재련, 백연아, 밥 힐드레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학교에만 기댈 수 없어”

김= 결국 엄마들이 바뀌어야 한다.

조= 엄마들이 많이 바뀌고 있는데 내가 맞는다는 자신감이 없고, 지지기반도 없고, 개별적으로 건의하니까 불안하다.

김= 독일 연수원 시절 지역 체육 행사에 참가한 적이 있다. 꼬마들이 달려와서 과자를 따먹는 게임이었다. 저랑 제 친구가 과자 3개를 매달았더니 한 독일 엄마가 뛰어왔다. ‘8개를 다 달아달라. 달리기를 잘하지 못하는 애들도 목적지까지 왔으면 공평하게 과자를 먹어야 한다’라고 하더라. 확 와 닿았다.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쿠키만 있으면 여유 있게 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팀이나 개인이나 레벨을 정하지 말고 잘하는 것을 알아주면서 발에 신발을 맞춰야 한다.

신= 내년에 학교에 들어가면 반드시 학부모운영회에 들어갈 생각이다. 우리 아이가 동네에서 행복하게 학교에 다니면 좋겠다는 게 작은 바람이다. 그래서 마을의 문제와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에도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어떤 교사가 있는지도 관심이다. 동네에서 학부모들과 모임도 만들려고 한다.

백= 구체적인 액션 플랜이 중요하다. 자치적인 모임을 통해서 각자의 토의를 지속하는 것이 좋다. 동마다 의식도 다르고 해서 학부모가 모여서 토론하는 게 중요하다. 학교와 소통하는 게 중요하다.

김=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다. 미래인 아이들이 시들지 않고 살아서 펄떡거리는 생선처럼 생동감 있게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게 어른들의 책임이다. 뭘 잘하는지가 아니라 뭘 하면 행복할지 잘 살펴보고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정부에 전달해서 정책적으로 보완할 수 있도록 협의체가 지속하면 좋겠다. 우리 미래뿐 아니라 더불어 행복해질 수 있다.

밥= 엄마들이 일등만 강요하는 게 답은 아닌데 다른 대안을 보여주지 못해서 문제가 된다. 자녀들에게 어떤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까. 다른 나라의 제도를 모두 살피며 가능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변화는 부모의 관심과 의식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