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피해자가 ‘그럴’ 순 없어, 성폭행 피해자는 ‘그렇지’ 않을까, 김재련 변호사는 이러한 편견에 균열을 내고자 했다. 세상이 요구하는 피해자다움을 완전하게 갖춘 피해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완벽한 피해자>를 통해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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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은 피해자의 권리이지 의무가 아니라는, 이 간단한 상식이 성범죄 피해자들에겐 적용되지 않는다. ‘완벽한 피해자’에 대한 허상이다. 성폭력, 가정폭력 등 1000건이 넘는 사건을 변론한 김재련 변호사가 그간의 경험을 모아 <완벽한 피해자>라는 책을 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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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 의대생들이 함께 떠난 여행 중 동기를 성추행한 사건, 60대 여성이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하고도 꽃뱀으로 몰려 투신자살한 사건, 40대 연예기획사 대표가 열다섯 살 중학생을 임신시킨 사건 등 사회적 이슈가 됐던 사건으로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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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겐 이미 잊혔을 사건을 다시 끌어올려 내놓는 과정이었다. 김재련 변호사는 이 책을 쓰는 내내 ‘피해자가 읽었을 때 불편할 수도 있다’라는 생각에 짓눌려야 했다. 그의 표현대로 옮기면, 한겨울에 옷을 입은 채로 바다 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다시 그 바다로 들어가는 끔찍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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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련 변호사와의 인터뷰는 5월 12일에 이뤄졌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개봉에 앞서 2차 가해 논란이 한창인 시기였다. 박 시장 성폭력 피해자의 변호인인 그는 해당 이슈와 관련해 SNS 글을 꾸준히 올리고 있다. 인터뷰 약속 시간이 5분 정도 지났을 무렵 벌게진 얼굴의 김재련 변호사를 마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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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방에 있었는데 격하게 타이핑하는 소리가 들리더라. 또 페이스북에 글을 쓴 건가. 하, 지금 제 감정이 너무…. 그 다큐멘터리 때문에 피해자도 피해자 가족도 되게 힘든 상황이다. 상영 금지 가처분 안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게 말이 쉽지. ‘똥멍청이들’이 한마디할 때마다 내가 뭔가를 해야 한다면 맡고 있는 또 다른 일은 어떻게 할 것이고, 피해자는 계속 그 기억을 떠올려야 할 것이며… 결국 피해자가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건 맹수들이 들끓는 경기장 안에 고양이 한 마리 넣어두고 칼 쥐어주면서 “싸워봐. 그거 쓸 수 있는데 안 쓸 거야?” 하면서 관람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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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법이 있나. 상영 금지 가처분을 꼭 피해자가 해야 한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해주면 좋을 거다. 피해자가 박 전 시장을 고소한 사실이 유출됐을 때 그 경위를 조사해달라는 진정은 우리가 하지 않았다. 제3자인 변호사 단체가 고발했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나서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살 방조는 처벌받는다. 어떤 범죄를 용이하게 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것인데, 이렇게 국가기관이 인정한 사실조차 부정하는 극악한 2차 가해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기만 하는 건 사회적인 방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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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피해자>를 읽을 때 들었던 일종의 불편함이 지금 또 느껴지는 것 같다. 반성 같기도 하고. 사실은 우리 모두 자유롭지 않다. ‘내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네’를 인지해야만 바꿀 수 있지, 그조차 모르면 계속 같은 행동을 할 거다. 피해자가 언제까지 대중 앞에서 피해 사실을 얘기하길 강요하는지 모르겠다. 피해자는 수사기관과 국가인권위원회에 사실을 밝혔고, 인권위가 결정을 내렸고 법원이 판단을 해줬음에도 아랑곳하질 않는다. 이런 광경을 봐야 하는 피해자는 어떤 생각을 할 것이며, 이 사건을 지켜보는 사람들 중 앞으로 자신이 피해를 입었을 때 누가 목소리를 내겠나. 어제도 욕설이 담긴 문자를 받았다. 이렇게 되면 누가 이런 사건의 피해자를 대리할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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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그런 연락을 받는다니… 모 페이스북 유저는 내가 핼러윈 참사 때 사망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더라. 주범은 나라고. 박원순 시장이 있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인데 내가 피해자를 대리했기 때문에 참사가 일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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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건을 맡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본 적 없나. 없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자리에 피해자가 앉아서 피해 사실을 이야기했다. 법적으로 책임을 묻겠다는 의지가 명확했다. 변호사로서 그런 피해자의 사건을 맡지 않는 게 이상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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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원순 전 시장 성폭행 사건에 가장 적합한 결말은 뭐라고 생각하나. 결말이라고 표현하긴 그렇고, 우리 사회는 법이 정한 부적절한 행위를 했을 때 가해자는 어떻게 책임지고 피해자는 어떻게 보호받아야 하는지 규정됐다. 2020년 7월 피해자가 문제 제기를 한 이후 가해자가 사망하면서 수사는 ‘공소권 없음’ 처리됐지만,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행위는 성희롱이라고 인권위가 결정했다. 법원은 인권위의 결과가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가 나온다고 한다. 이게 과연 정상적인 법치주의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이해할 수 있는 행동들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시장님을 믿습니다’라고 한다. 믿음은 가치 판단, 주관적 영역이지만 사실은 존재, 객관적 영역이다. 그 사람들의 믿음에 대해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국가기관이 인정한 사실을 왜곡하고 부정하는 행위는 책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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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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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피해자>에 기록된 사건들 중 한 여성은 산부인과 검사를 받다가 의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가해자 성기에서 피해자 유전자가 검출됐으나, 가해자는 “의료용 장갑을 끼지 않고 맨손으로 내진했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 유전자가 내 손에 묻었고, 경찰이 증거 채취할 때 내가 직접 손으로 성기를 잡는 바람에 묻은 것”이라고 반박했다. 중요 증거가 오염돼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취지로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피해자는 무죄판결이 확정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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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피해자들의 사례가 안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야 한다. 죽음조차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해군 중사가 2차 가해를 호소하다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이 있다. 정치인이 조문을 오고 대통령이 공분했다는 기사도 나오고 그렇게 2차 가해자가 구속됐는데… 피해자가 죽어야지만 발동하는 공감이 역겹다. 피해자한테 죽으라는 이야기 아닌가. 억울함을 호소하되 죽지 않으면 피해자를 비난하고 의도를 의심하고 공격하는 경우가 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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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성범죄 피해자는 끊임없이 의심받고 피해자다움을 강요받을까. 어린아이가 성폭력을 당해 장기가 빠져나왔다거나, 피해자가 저항 과정에서 살인을 당하는 등 범죄 피해 결과를 볼 수 있을 땐 사람들은 공분한다. 근데 대부분의 성폭력 사건은 피해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누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 가슴을 만졌다고 해서 그 결과가 눈에 보이나? 그러니까 ‘그게 뭐 대수’라고 하면서 진짜 피해를 입은 것이 맞는지 계속 의심한다.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있어도 말하지 않는 피해자도 있다. 말하고 나면 “쟤는 앞으로 인생 어떻게 살아”, “더럽혀졌네”, “자랑이라고 떠들고 다니냐”는 식으로 비난하기 때문이다. “너도 잘한 게 없네. 그러게 왜 그 밤에 거기까지 가서 네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마셨니”라고 한다. 내가 몸을 못 가눌 만큼 술을 마시는 게 누구든 내 몸을 함부로 해도 된다고 허용하는 건 아니다. 취한 사람을 안전하게 귀가시켜주는 게 주변의 역할 아닌가. 오히려 “너 때문에 저 사람(가해자) 가정이 파탄 났다”면서 피해자를 비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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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지인이 피해 사실을 밝혔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맞나. 어떤 반응을 보여주는 것에 대한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다른 범죄 피해자하고 다르게 봐선 안 된다. 흔히 교통사고를 당한 지인에게 “괜찮아? 많이 안 다쳤어? 안정을 취해야겠다”라고 말하지, “너 정말 피해본 거 맞아? 무슨 의도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야?”라고 하진 않는다. 성폭력 피해자가 다른 사건 피해자와 달리 여겨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교통사고 피해자가 다시 운전대를 잡을 수 있듯이, 성폭력 피해자도 멀쩡하게 직장에 다니고 여행 가고 SNS를 할 수 있는 거다. 성폭력 피해자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왜 다른 범죄 피해자에게 요구하지 않는 굴레를 성폭력 피해자에겐 씌우려고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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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가 유튜브를 개설해 피해 사실과 회복 과정을 담은 콘텐츠를 본 적 있다. 그때 내가 그랬었다. 어떻게 이런 내용을 공개할 수 있느냐고. 피해자가 회복하는 방식은 저마다의 성향, 기질, 지지기반, 처한 환경에 따라 다 다르다. 누군가는 가족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세상에 알리고 다른 사람도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자기 삶에서 발생한 피해를 해결하는 방법은 각자의 선택이다. 제3자인 그 누구도 피해자의 목소리를 앞서 나가선 안 된다. 다만 피해자가 피해를 해결하는 방식이 다소 부적절할 수도 있다. 성폭력 피해자라고 절대적으로 옹호를 받아야 하는 건 아니다.

‘양가감정’에 관한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친부 성폭력 피해자인 중학생 아이가 법정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로 피고인에게 “밥은 먹었는지… 미안해요”라고 했다던데. 아이는 사촌언니 집에 얹혀살았고 아빠는 내내 노동하다가 주말에만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피붙이였다. 지지기반도 없는 아이가 그렇게 고통 받다가 겨우 신고했는데, 구속된 아빠를 보니 마음이 무거웠던 거다. 굉장히 많은 피해자들이 그런 감정을 갖는다. 가해자가 구속돼서 너무 시원하다고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벌을 받길 원해서 신고했지만 막상 가해자가 구속됐을 때 피해자들은 정신적 부담을 느낀다.